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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이름 | 2009/10/05 15:44 | ☞ 공지사항 | 트랙백

부대찌개에서 이쑤시개 좀 나온다고 뭐 대수냐

배는 고프고,
그거라도 만들어서 배도 불리고 나름대로 색다른 맛을 즐길수도 있다는 것에 그저 만족할뿐이겠지.

  어려웠던 시절, 물자는 부족하고 농산품이든 공산품이든 생산할 환경도 마땅찮고 그러다보니 아무리 하빠리들이라도 우리를 구해준 선진국 미국 군인들이 주식으로 먹으면서 덩치도 크고 힘도 센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을 것이다.

미제면 이미 더 말 할 것도 없었고 군용, 군납이라고 찍혀있다해도 그거야말로 선진국 정부가 인증한 신용의 보증 수표였으니 그것을 조달하고 유통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의 신인류요 능력자가 아니고 무엇이었을까 말이다.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이라 할지라도 이런 생리는 변한 것이 없어서 그 소재만 휘황찬란하고 첨단의 그 무엇이며 다양하게 세분화 되었을뿐 본질적 구도는 오히려 공고화 되었다. 

그래도 버린 것들 중 프랑크 소세지며 햄버거 패티며 콩스튜며 스팸 쪼가리며 정성껏 찾아다가 된장 탁 풀어서 빠글빠글 끓여 놓으면 구수하면서도 칼칼하고 기름진 것이, 속도 든든한 쓰레기탕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또 잘만 찾으면 유통기한은 지났어도 포장도 뜯지 않았고 꽝꽝 얼어 있어서 먹어도 전혀 지장 없음이 확실한 일급 재료들을 발견하는 것도 가능했을테니, 그것이야말로 쓰레기탕을 끓이면서도 찾을 수 있는 큰 보람이자 참된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 빈곤한 와중에도 이렇게 번듯한 것을 찾아내어 굶주린 많은 이들과 함께 배고픔을 달래며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 줄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맛에 길들여진다는 게 참 우습고 그 길들여진 맛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는 것이 또 촌극을 빚어내는 것이, 지금은 수많은 오리지날의 경쟁시대가 되었고 새롭고 신선한 재료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굳이 그시절 그때의 쓰레기 맛을 그리워 하는 수요가 있으며, 엄청난 대박 부자가 될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와 같은 수십년 단골의 입맛을 맞추는 것이야말로 성실한 장사꾼의 올바른 태도라는 신념이 탄탄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향수 어리게 그리던 그 정신적 고향이 미군 쓰레기통에 있는한 그가 추구할 모든 미학적 정서적 이상향이 결론적으로 미군 쓰레기통에 처박힐수밖에 없다는 현실. 나는 이것을 비난하고 대다수는 이것을 용인하며 또 소수는 이것을 옹호한다. 서양식으로 보자면 탈피요 동양식으로 보자면 극기로 불릴 수 있는, 그 노력이 경주되지 않는 모든 삶을 향해, 나는 비난이 가장 적절한 보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과 그 주변 무리의 구태를 합리화 하는 태도만큼 추악하고 얄팍하며 해로운 게 또 어디있을까 말이다.

추석이며 설이며 명절 선물로 스팸이 왔다갔다 하고, 철만 되면 '흰 쌀밥에 스팸 한 조각'하며 광고를 해대는 이 현실을 확대 재생산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교포찌개 좀 그만 끓여라.

- 낯선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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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이름 | 2009/09/05 12:28 | ☞ 에세이 | 트랙백(1)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내가 요즘 이 말을 자주 한다.

 

'25세기 전에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버려가며 보여주려고 했던 교훈을 사람들은 아직도 모른다'

 

스스로의 진실과 직면하라

우리 손 안의 진실과 직면해야 한다는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그 어떤 최선도 사회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결코 성장에 기여할 수 없다는 교훈, 아무리 위대한 진리라도 인간이 사는 환경, 인간을 만드는 바탕인 사회의 일부로 조성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교훈 말이다.

 

결코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세계를 가리킨 적이 없었던 소크라테스. 그는 그토록 우리의 손 위를 보라고, 그 위의 진실과 직면하라고 외쳤다. 보이지 않는 어떤 곳을 향하는 시선과 그것을 추종하려는 선택의 무지함을 손 위의 진리 앞에 직면시켰고, 그렇게 탄로난 사람들은 자기 손 위의 대단치 않은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한껏 부풀려진 이상에 대한 욕망으로 소크라테스를 지워버렸다.

 

그는 사람들의 애절한 소망을 들어주고 위로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 근원과 만나게 해 주는 중개자였으며 이는 결코 그가 진리를 위한 순교를 하고서도 어떤 종교의 귀신도 되지 않게끔 만들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를 믿으면 손안의 진리를 외면하는 우리의 모자라고 부끄러운 진실과 직면하게 될 뿐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그 어떤 작은 소망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그의 깨우침을25세기에 걸쳐 거부하고 있으며 단지 스스로를 치장하기 위한 소재 이상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는 진리가 우리의 손 위에 있음을 알려주려 했고, 그것을 사용하라고 울부짖었으며, 진리와 직면하여 그것을 따를 용기가 없었던 우리들의 선택과 분노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 그의 죽음은 허황된 미지의 세계로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인간 사회의 본질적 저열함을 자신의 생명으로 드러내고 또한 증명해 주면서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마치 그의 평생을 통해 완성했던 대화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명을 던진 대화법을 통해 하고자 했던 질문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깨우쳐야 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우리들 자신의 본질적 추태를 드러내 주는 것,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진실과 직면한 인간이 있어야 할 곳

또한 그가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지 않았으며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으로부터 사회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결코 성장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신선이나 도인 또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간이 나고 자라고 죽는 그곳이 인간이 있어야 할, 인간이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사회의 변화와 성장을 바랐던 것이지 결코 옳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죽을때까지 연설을 하려고 한시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연설이 아니라 깨우침을 근간으로 한 성장이었기에, 깨우침이 있어야 할 곳, 성장이 있어야 할 그곳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사회의 참된 용기와 성숙한 선택을 바랬을 것이며 그러지 못한 순간, 그는 죽음의 대화법을 통해 우리의 추태를 드러내 주었고 또 하나, 우리가 변화를 바란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 것인지를 마지막까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실로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의 사후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혁명이 지나갔으나 우리는 여전히25세기 이전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애처롭게도 우리를 끓어오르게 했던 그 많은 이데올로기와 혁명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부정과 이상향의 제시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매번 껍데기는 바뀌었지만 그 안의 원리는 늘 소크라테스도 깨우쳐주지 못했던 그 상태 그대로였던 것이다. 아직도 스스로의 진실과 직면하지 못하고 허황된 이상향을 꿈꾸며 성숙한 태도와 결단으로부터 내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어떻게 하면 새로운 무언가를 이식하지 못할까 안달만 내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로부터 어떤 변화가 초래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외계인이 될 수는 없으며 외계와 닿을 수 있다는 착각이 우리를 무지몽매한 원숭이 무리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인간이며 때문에 인간다워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인간다운 것 이상이거나 이외 일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다울 수 있는 공간의 시작과 끝은 사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존의 사회를 벗어나 밀림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두 명만 모이면 그곳은 다시 사회이고 비극적이게도 미개한 사회로의 퇴화를 달성할 뿐 고도화된 사회의 부조리를 바라보며 그렇게도 꿈꾸던 에덴 동산으로의 도약은 아닌 것이다. , 바로 이 사실에 직면하여 문제를 풀어낼 수 있어야 내적 변화가 올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외의 모든 주장과 주창자들은 멍청이들이거나 사기꾼이며 이를 분별하고 추종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최소한 비극만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2400년이 지나, IT선진국의 국민으로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청년들은 서로의 치부를 감싸주는 것을 기본적인 예절이라는 의미에서 매너라고 부르고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본인이 스스로와 직면하기 싫을 때, 그렇게 하더라도 번지르르한 껍데기 안에서 먹고 살아만 진다면 좋은 삶이라는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침묵의 카르텔에 우리의 미래를 향한 뿌리는 썩어 들어가고 있다. 바로 이런 우리들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런 우리들에게 아무리 선택권을 행사하라고 해봐야 소용없다. 그 결과는 뻔하다. 번지르르해 보이는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치부를 드러내어 진실과 직면하라는 그 어떤 요청도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 의사당을 물리력으로 점거하거나 그 외의 지역에서 정치력을 행사하려는 행위. 그런 행위라 할지라도 자신의 생각과 부합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사고. 5년이든10년이든 정권의 비판에는 열성적이다가도 정작 사회를 바꿀 기회가 오면 정해진 숫자와 늘 보던 얼굴 이외에는 선택하지 않는 행위. 지식과 논리와 합리를16년 이상 배우고도 정작 중요한 결정에는 엄마 말, 아빠 말, 목사님 말씀, 친구들 하는 대로, 시간 나면 하고 아니면 관두고자 하는 행위.

 

나는 이 행위들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고 있는 일련의 시간을 지켜보며 소크라테스 그 죽음의 순간은, 독약이 주는 통증보다 무지몽매한 인류의 뒤통수를 머리 벗겨진 난쟁이 똥자루 뚱보 늙은이의 한 목숨으로 후려갈겨주는 통쾌함이 지배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진리의 실존을 검증하는 작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우주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멸망까지 함께하는 것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진리와 직면할 용기를 갖으며 그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그런데도 본질을 외면하고 본분을 망각하며 욕망과 두려움에 흔들리고 껍데기와 이미지에 현혹되는 우리들에게라면, 언제든 족쇄와 채찍질과 여물통 이상의 선물이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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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이름 | 2009/09/03 15:45 | ☞ 에세이 | 트랙백

문제의 핵심을 외면하고 껍질에 집착하시는 chatmate님께

터키탕의 예를 드셨군요. 아주 좋은 예입니다.

불법 성매매가 문제이지, 이름이 문제가 아니다 
  터키탕의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이름이? 내용이? 재미있게도 터키 대사관쪽에서 공식 요청이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터키와 관련도 없는 음지 문화가 한국에서 터키탕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국가 이미지에 피해가 되며, 이를 단속하고 홍보해 달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터키 대사관의 요청대로 터키탕의 이름을 바꾸니까 성매매 행위가 줄어들던가요? 네, 업소들이 이름을 바꾸어 영업을 계속하다보니 최소한 터키 대사관의 억울함은 해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불법 성매매를 앓고 있는 문제의 주체이자 피해자로서의 우리 사회는 어떤 소득을 얻었을까요? 안타깝게도 터키의 억울함을 해소했는데도 우리가 얻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요. 

문제의 핵심에서 이야기 하라
저는, 사회적 문제를 바라 볼 때에는 그것이 사회적 관점에서 왜 문제가 되는지 핵심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터키탕 문제를 예로 들자면 그 사회적 문제의 핵심은 '성매매 업소의 창궐과 단속의 허술함'이었지 결코 '터키탕'이라는 이름이 아니었으며, 터키 대사관의 공식 항의와 이에 따른 단속 및 터키탕이라는 용어의 사용 금지조치는 '성매매'라는 사회적 문제의 핵심에서 파생된 에피소드의 하나였을 뿐, 결코 그 핵심도 해법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어떻게 부르는 것이 정당하냐', '어떤 이름이 맞느냐'를 가져다가, 세간에 제기되는 어법상의 오류라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이름이라는 껍데기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마치 그것이 사회적 문제 현상의 핵심인양 다루려 하시는 것이 글쓴분의 말릴 수 없는 고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드린바와 같이, 그거야 글쓴분의 고집일 뿐이지, 결코 사건의 핵심도 해법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름을 바꿔 불러볼까
이렇게, 터키탕의 이름을 바로잡는 것은 잘못된 내용을 수정해주는 해법이 아니었습니다. 터키탕으로 제기 되었던 불법 성매매 업소의 행태는 현재 '안마시술소'의 이름으로 그 간판만 바뀌어 매우 성행하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매체의 발달, 수요의 다양화에 힘입어 그 불법 컨텐츠가 나날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즉, 글쓴분 방식의 현실 인식을 따르고, 글쓴분 식의 해법을 따라서는 해당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단지, 이름을 성공적으로 바꿀 수 있었을뿐이라는 것이지요. 아니, 아예 터키탕이라는 용어를 사용 못하게 했는데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성매매가 인류와 뗄 수 없는 소재라 할지라도, 그래서 성매매 자체를 줄이거나 없애는 게 불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목욕을 이용한 방식'만이라도 없앨 수 있는 접근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멍청한 정부와 경찰들은 핵심이 아니라 껍데기에 집착하다보니 결국, '터키탕'이라는 이름만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사회적 문제는 해결도 개선도 하지 못하고 터키 정부의 요구나 열심히 들어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 정부를 어느나라 정부이며 지능지수가 어떻게 되는지 의심치 않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문제의 핵심을 이해 못한 논쟁은 지성의 낭비이며, 사회적 시비의 확산이란 역효과에 불과하다
이처럼 어떤 문제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비틀어진 내용의 바로잡아야 할 핵심을 이해하고 딱 그 핵심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지, 껍데기에 집착해서 시비나 키우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뿐더러 시비를 키우고 복잡하게 만들어서 결국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 당신이 억울해 하는가
이렇듯 이름 따위의 문제는 성매매라는 핵심 문제를 해결하고 난 다음에나 고려해볼만한 아주 부차적인 문제이지요. 아니면 그런 사회 현상과는 별도로, 전공자들 사이에서만 연구를 진행해도 되는 사안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편 터키 대사관이 그랬듯이 이름에 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은 그 억울함을 느끼는 당해 피해자가 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글쓴분을 이상하게 본 것입니다. 아니, 일본어와 일본인이 피해를 당했으면 일본인이나 일본 정부가 억울해 해야지, 왜 한국인이 억울해 하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직업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마저 희석시키고 교란하던가요? 아니면 애초부터 없었거나 나름의 특수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때문에 저는 그 부차적인 문제에 관해 그렇게나 억울하셔야 할 이유가 '우리(한국사회)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 있다면, 그래도 납득은 가겠다고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일본이 얼마나 억울할지 생각해 보라니...정작 당사자인 일본인들은 억울하다는 말도 안해서 본 적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공감하고 입장바꿔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면서 혹시 글쓴분이 모든 경계를 초월한 세계 이성의 경지에서 말씀하신게 아닐까 생각해 보다가도 문제의 핵심을 비켜 저 엇나간 곳에 이토록 집착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자연히 접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말을 어긋나게 하고 말지 생각이 어긋나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일본문화의 접점에서 나타나는 어법 사용상의 오류보다 더 심각한 일이 이미 글쓴분의 마음속에서 심각화 되지나 않았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잘 못 사용하는게 문제라면, 잘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해법
결국, 일본 문화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어법상의 왜곡과 잘못된 용례는 한국어 사용법을 보다 명확히 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는 것, 저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의 오염이 일어나는 곳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해법일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뿐만이겠습니까. 표현과 접근이 다양할 뿐, 이것이 세상 모든 분야 모든 문제의 핵심에 관한 올바른 접근법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요. 

부차적인 그 '이름'에 관해
그런데 여기에다 대고 '그건 이름이 틀렸어'라고 문제제기 하여 '일본에서 그러는 사람 없으니 증거를 대봐'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현상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한발 더 나아가서 '내 궁금증의 근거를 니가 찾아줘'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덧글의 링크를 통해 글쓴분이 직접 하셔야 할 수고를 일부 수행해 드렸으니, 부디 시간 나시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언어의 왜곡 현상에 대해 주지하는 계기를 갖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어 사용법을 보다 엄격히 하여 바른 말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렇게 해서 잘못된 내용들이 고쳐진 다음에, 그 다음에야, 비로소 '과연 어떤 이름이 그 문제를 지칭하기에 적절한가' 하는 것에 관해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문화가 한국에 접하는 영역에서 어떤 매체를 통해 어떤 식으로 확산되고 왜곡 되고 변형되며 문제를 형성했는지 연구하신 다음에 이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부르기 좋은 이름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러려면 먼저 이름 그 자체보다는 다시 사회적 문제의 핵심부터 올바로 인지하고 공부하셔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어 사전이나 한국어 사전만 뒤적일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곳. 즉, 언어가 활용되는 현장을 찾아 다니셔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어에 대한 애정에 앞서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자각부터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말도 바로 못하는 일빠 찌질이들조차도 한국인이며 그들이 빚어내는 현상마저도 한국 사회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내 문제처럼 해결하려는 의식이 있는데,

글쓴분은 그러신가요?

- 일본어 번역어투에 관한 저의 예전 글
http://skctjs.egloos.com/137290
http://skctjs.egloos.com/137402

- 위의 제 글에 관한 chatmate님의 관련 글
http://chatmate.egloos.com/1942736
http://chatmate.egloos.com/194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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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이름 | 2009/09/01 19:59 | ☞ 에세이 | 트랙백

우리를 향한 우리의 시선이 우리를 절망 속에 가둔다

개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혁명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구제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능동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그런데 혁명은 무엇인가. 더 이상 참고 견디는 것이 불가능할때 터져나오는 비명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사회라는 유기체의 말초적 반사행동과도 같은 것이다.

개혁은 그릇의 쓰임을 바꾸는 것이고 혁명은 그릇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그릇에서의 주도권 쟁탈전은 결코 그 그릇의 쓰임을 바꾸지 못한다. 주도권 쟁탈전의 양상이 '쓸 권한의 획득'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쓰임이란 이미 그 그릇 자체가 되어 있어서, 혹은 그 사회의 인식이 그 이외의 활용을 허용하지 않고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때문에 새로운 세력이 그 주도권을 획득했다 할지라도 대중의 인식마저 깨뜨려야 하는 상황 앞에 무력해지게 된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흔히, 대중 앞에 소수의 개혁파가 정면으로 맞서다가 저희들 무리 내에서조차 왕따를 당하게 되든지, 구태와 똑같은 것을 새로운 것이라며 잘 포장해서 대중의 눈밖에 나지 않도록 하는 기술자들이 넘쳐나게 되거나, '점진적 개혁'이라는 수구 논리에 귀착되면서, 희망이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인류의 삶에 교훈을 주는 광경을 진저리 나도록 목격하게 된다.

권력을 만드는 세가지 원소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그릇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그릇을 정의하는 것은 하나의 힘이 아니다. 그릇, 그릇을 주도적으로 쓸 권한, 그리고 그 그릇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의 그릇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모두 변화시켜야 개혁이든 혁명이든 이루었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유권자들은 선택을 해야한다.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저 세가지를 바꿀 수 있는 '주체'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외계의 그릇, 외계의 기술, 외계의 시선만이 실질적 해법
하지만 어렵다. '대한민국 정치권' 혹은 '대한민국의 권력'이란 그릇은, 마치 블랙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거대한 변화의 패러다임조차도, 우리가 애써 그것을 선택(물론 그런 적도 없지만)한다 하여도, 한낱 그릇의 용적 속으로 손쉽게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마니까. 그래서 대중들의 외계인을 바라는 마음은, 역사적이며 선험적 깨달음일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결함이 없는 바람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엔 '도래인' 같은 존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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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이름 | 2009/08/27 11:37 | ☞ 에세이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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