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이미 나와 있다.

내가 요즘 이 말을 자주 한다.

 

'25세기 전에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버려가며 보여주려고 했던 교훈을 사람들은 아직도 모른다'

 

스스로의 진실과 직면하라

우리 손 안의 진실과 직면해야 한다는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그 어떤 최선도 사회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결코 성장에 기여할 수 없다는 교훈, 아무리 위대한 진리라도 인간이 사는 환경, 인간을 만드는 바탕인 사회의 일부로 조성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교훈 말이다.

 

결코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세계를 가리킨 적이 없었던 소크라테스. 그는 그토록 우리의 손 위를 보라고, 그 위의 진실과 직면하라고 외쳤다. 보이지 않는 어떤 곳을 향하는 시선과 그것을 추종하려는 선택의 무지함을 손 위의 진리 앞에 직면시켰고, 그렇게 탄로난 사람들은 자기 손 위의 대단치 않은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한껏 부풀려진 이상에 대한 욕망으로 소크라테스를 지워버렸다.

 

그는 사람들의 애절한 소망을 들어주고 위로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 근원과 만나게 해 주는 중개자였으며 이는 결코 그가 진리를 위한 순교를 하고서도 어떤 종교의 귀신도 되지 않게끔 만들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를 믿으면 손안의 진리를 외면하는 우리의 모자라고 부끄러운 진실과 직면하게 될 뿐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그 어떤 작은 소망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그의 깨우침을25세기에 걸쳐 거부하고 있으며 단지 스스로를 치장하기 위한 소재 이상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는 진리가 우리의 손 위에 있음을 알려주려 했고, 그것을 사용하라고 울부짖었으며, 진리와 직면하여 그것을 따를 용기가 없었던 우리들의 선택과 분노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 그의 죽음은 허황된 미지의 세계로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인간 사회의 본질적 저열함을 자신의 생명으로 드러내고 또한 증명해 주면서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마치 그의 평생을 통해 완성했던 대화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명을 던진 대화법을 통해 하고자 했던 질문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깨우쳐야 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우리들 자신의 본질적 추태를 드러내 주는 것,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진실과 직면한 인간이 있어야 할 곳

또한 그가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지 않았으며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으로부터 사회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결코 성장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신선이나 도인 또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간이 나고 자라고 죽는 그곳이 인간이 있어야 할, 인간이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사회의 변화와 성장을 바랐던 것이지 결코 옳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죽을때까지 연설을 하려고 한시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연설이 아니라 깨우침을 근간으로 한 성장이었기에, 깨우침이 있어야 할 곳, 성장이 있어야 할 그곳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사회의 참된 용기와 성숙한 선택을 바랬을 것이며 그러지 못한 순간, 그는 죽음의 대화법을 통해 우리의 추태를 드러내 주었고 또 하나, 우리가 변화를 바란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 것인지를 마지막까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실로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의 사후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혁명이 지나갔으나 우리는 여전히25세기 이전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애처롭게도 우리를 끓어오르게 했던 그 많은 이데올로기와 혁명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부정과 이상향의 제시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매번 껍데기는 바뀌었지만 그 안의 원리는 늘 소크라테스도 깨우쳐주지 못했던 그 상태 그대로였던 것이다. 아직도 스스로의 진실과 직면하지 못하고 허황된 이상향을 꿈꾸며 성숙한 태도와 결단으로부터 내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어떻게 하면 새로운 무언가를 이식하지 못할까 안달만 내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로부터 어떤 변화가 초래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외계인이 될 수는 없으며 외계와 닿을 수 있다는 착각이 우리를 무지몽매한 원숭이 무리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인간이며 때문에 인간다워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인간다운 것 이상이거나 이외 일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다울 수 있는 공간의 시작과 끝은 사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존의 사회를 벗어나 밀림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두 명만 모이면 그곳은 다시 사회이고 비극적이게도 미개한 사회로의 퇴화를 달성할 뿐 고도화된 사회의 부조리를 바라보며 그렇게도 꿈꾸던 에덴 동산으로의 도약은 아닌 것이다. , 바로 이 사실에 직면하여 문제를 풀어낼 수 있어야 내적 변화가 올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외의 모든 주장과 주창자들은 멍청이들이거나 사기꾼이며 이를 분별하고 추종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최소한 비극만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2400년이 지나, IT선진국의 국민으로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청년들은 서로의 치부를 감싸주는 것을 기본적인 예절이라는 의미에서 매너라고 부르고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본인이 스스로와 직면하기 싫을 때, 그렇게 하더라도 번지르르한 껍데기 안에서 먹고 살아만 진다면 좋은 삶이라는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침묵의 카르텔에 우리의 미래를 향한 뿌리는 썩어 들어가고 있다. 바로 이런 우리들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런 우리들에게 아무리 선택권을 행사하라고 해봐야 소용없다. 그 결과는 뻔하다. 번지르르해 보이는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치부를 드러내어 진실과 직면하라는 그 어떤 요청도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 의사당을 물리력으로 점거하거나 그 외의 지역에서 정치력을 행사하려는 행위. 그런 행위라 할지라도 자신의 생각과 부합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사고. 5년이든10년이든 정권의 비판에는 열성적이다가도 정작 사회를 바꿀 기회가 오면 정해진 숫자와 늘 보던 얼굴 이외에는 선택하지 않는 행위. 지식과 논리와 합리를16년 이상 배우고도 정작 중요한 결정에는 엄마 말, 아빠 말, 목사님 말씀, 친구들 하는 대로, 시간 나면 하고 아니면 관두고자 하는 행위.

 

나는 이 행위들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고 있는 일련의 시간을 지켜보며 소크라테스 그 죽음의 순간은, 독약이 주는 통증보다 무지몽매한 인류의 뒤통수를 머리 벗겨진 난쟁이 똥자루 뚱보 늙은이의 한 목숨으로 후려갈겨주는 통쾌함이 지배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진리의 실존을 검증하는 작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우주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멸망까지 함께하는 것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진리와 직면할 용기를 갖으며 그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그런데도 본질을 외면하고 본분을 망각하며 욕망과 두려움에 흔들리고 껍데기와 이미지에 현혹되는 우리들에게라면, 언제든 족쇄와 채찍질과 여물통 이상의 선물이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 낯선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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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이름 | 2009/09/03 15:45 | ☞ 에세이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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